박영립(법학 75학번) 변호사,
“일본 변호사는 소록도에 직접 가겠다더군요, 제가 얼마나 창피하던지”
올해 20주년 맞은 한·일 한센인권변호단
일본 정부의 한센인 피해 보상에 이어
강제격리된 한센인 가족들도 보상 받아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방안 모색하다
박근혜 정권의 ‘위안부 합의’로 시도조차 못해
일본 양심세력과 꾸준히 교류해야 미래 열려
<박영립 한센변호인단 단장이 2024년 6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sk@hani.co.kr>
윤석열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 ‘제3자 변제’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묵인 등 굴욕적 자세로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섰지만, ‘나머지 물잔 절반’을 채워줄 것으로 기대했던 일본 기시다 정권은 오히려 과거사 역주행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일본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중등 사회과 교과서에는 ‘종군위안부’ 표현이 삭제되고,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해서도 ‘강요받았다’는 표현을 지웠다. 게다가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로 표현한 교과서는 더 늘었다. 최근 일본 정부는 한국 국립해양조사원의 독도 주변 해양 조사에 대해 ‘영해 침범’이라고 항의했다. 1945년 일본 패망 직후 강제동원 조선인 노동자들을 태우고 귀국하다 침몰한 우키시마호 승선 명부의 존재가 최근 확인된 것도 분노를 자아낸다. 그동안 생사만이라도 확인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에 일본 정부는 ‘승선 명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발뺌해 왔다. 이런 사실들은 한·일 과거사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게 한다.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반인권적 강제격리 정책으로 고통을 당한 한국 한센인(한센병 환자)들에게 두 나라 변호사들의 공조로 일본 정부의 보상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은 2004년 일본 변호사들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 모임 광주·전남지부와 대한변호사협회 문을 두드리면서 시작됐다. 당시 일본 변호사들은 일본 법원에서 한센인 강제격리 근거가 된 ‘나예방법’ 위헌 확인과 국가배상청구 소송에서 승소한 뒤, 일본 의회의 ‘한센인 보상법’ 제정으로 1만여명에 대한 보상을 받아낸 상태였다. 일본 변호사들은 일제강점기 한국과 대만에도 똑같은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듣고서 두 나라 변호사 단체를 접촉해 소송을 제안해 일본 정부 보상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는 다른 과거사 문제 해결에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지난 20년간 한국 한센인권변호단을 이끌어온 박영립 단장을 지난 19일 만났다.
―한·일 한센인권변호단은 여전히 활동 중인가?
“그렇다. 오는 29일 일본 도쿄에서 큰 행사가 열린다. ‘한센병 가족소송 승리 판결 5주년 기념집회’다. 일제강점기 한센인에 대한 일본의 폭력적인 강제격리 정책으로 피해를 본 건 당사자뿐 아니라 자녀들도 있다. 이들이 입은 피해를 배상하라는 소송이 일본 법원에서 2016년 시작됐는데, 2019년 6월28일 승소했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다. 올해 5주년 행사에 우리 쪽에선 조영선 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 모임 회장이 참석한다.”
―한국 한센인 가족들에 대해서도 보상이 이뤄지고 있나?
“물론이다. 일본 의회가 이 소송을 계기로 한센인 가족 보상법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일본 가족들이 먼저 보상 받았고, 한국 가족들도 보상 받게 됐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한반도에서도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을 시행했고, 그로 인해 자녀들도 고통받았기에 보상 대상이 된 거다. 이 법이 제정된 2021년부터 보상신청 작업을 해 130여명을 청구했다. 지금까지 70여명이 보상 받았다. 올 11월 효력이 끝나는 한시법이라 일본 변호사들과 함께 효력 연장 소송을 검토하고 있다. 아직 보상 받지 못한 한센인 가족들이 많다.”
―보상 신청에 어떤 어려움이 있나?
“한센인 가족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당시 자녀들을 위해 부모가 한센병 환자란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차별이 자식 세대까지 대물림되는 걸 막기 위해 가족 관계를 끊어야 했다. 한센병 감염 사실이 드러나면, 가족과 지역사회에서 추방되는 일종의 ‘사회적 죽음’을 맞는다. 가족으로부터의 추방은 ‘호적 말소’ 형태로 이뤄졌다. 그로 인해 가족 관계 증명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한센인과 그 자녀가 호적이 다르니, 가족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게 매우 어렵다. 가족들 사연을 들어보면 정말 가슴 아프다. 어릴 때 생이별한 자식이 장성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 식장까지 찾아갔지만, 예식장엔 발도 들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서성이다 돌아선 한센인 부부 사연을 듣고 변호사들도 펑펑 울었다. 한센인이 정착촌으로 떠나면 남은 가족들은 이사를 가버려 인연이 끊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60명 정도 남은 분들은 가족관계 입증이 잘 안돼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우리와 달리 호적 말소 같은 일은 없었다.”
―한센인권변호단이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일본 변호사들의 한센인 소송은 1960년대 일본에서 큰 사회문제가 됐던 미나마타병 관련 소송이 모태다. 미나마타병은 일본의 전후 부흥기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했다. 1950년대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에 들어선 화학비료 공장들이 메틸수은이 포함된 공장폐수를 무단 방류해 어패류를 먹은 주민들에게서 집단 발병한 공해병이다. 1960년대 소송이 시작됐는데,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관련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발단은 1956년 미나마타시에 살던 한 문인이 일본 규슈 지역 변호사협회에 보낸 편지였다고 한다. ‘공익을 위해 일한다는 변호사들이 어떻게 미나마타 시민들이 겪는 고통을 모른 체 하나’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에 각성한 일본 변호사들이 주민들을 대리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소송이 처음 제기됐을 때는 일본 사회 여론이 매우 부정적이었다. 전쟁 여파에서 막 벗어나 이제 겨우 좀 살만해졌는데 소도시에서 발생한 공해병 때문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야 하냐는 목소리가 나왔다. 변호사들은 그런 여론과도 싸워야 했다. 결국 주민들이 승소해 일본 의회가 보상법을 만들어 피해자 보상이 시작된 것이다.”
―한센병 소송은 미나마타병 소송을 벤치마킹한 건가?
“그렇다. 한센병 소송 참여 변호사들이 대부분 미나마타병 소송에 참여했던 이들이다. 계기도 비슷하다. 1995년 한센병에 걸려 일본 국립한센병요양소에 격리됐던 시마 히로시라는 작가가 ‘나예방법과 같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악법이 존속되고 있는 것에 인권보호에 앞장서야 할 변호사들의 책임은 없는가’라고 일갈하는 편지를 규슈 변호사협회에 보냈다. 이에 변호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곧바로 원고를 모아 1998년 소송을 시작했다.”
<박영립 한센변호인단 단장이 2024년 6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자신의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sk@hani.co.kr>
1907년 시작된 일본의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심각한 인권침해 요소가 있었다. 첫째, 요양소에 수용된 한센인들에게 강제노동을 시켰다. 신체 활동이 정상적이지 않은 환자들에게 강제노동은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줬다. 둘째, 한센병 박멸을 내세워 단종과 낙태를 강제했다. 요양소 탈출을 막기 위해 한센인들의 결혼을 인정하면서도 남성에게 전제 조건으로 단종을 강요했다. 그래도 임신이 되면 여성에게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강제실시했다. 셋째, ‘나병 없는 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가족이 지키고 있는 환자를 끌어내 지역사회에서 격리하기 위해 주민신고를 독려했다. 한센인들을 상대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인권침해를 일으킨 것이다.
“구마모토 판결이라는 역사적 판결이 나온 건 소송 3년 뒤인 2001년 5월이다. 일본 정부의 한센인에 대한 피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다. 일본 정부는 처음에 항소하려 했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변호사단체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어 항소 포기를 압박하고, 여론도 호응하자 항소를 포기했다. 일본 의회는 2001년 6월22일 한센인 보상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 따라 한센인 1인당 800만엔에서 1400만엔 정도 보상을 받게 됐다. 그러자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일제강점기 때 한국과 대만에서 벌어졌던 한센인 차별 정책을 모른 체 해선 안 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그래서 일본 변호사들이 또 움직였다. 소록도와 낙생원의 존재를 알게 된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거다. 그래서 일본 보상법에 근거해 소송을 내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다.”
2004년 5월27일 당시 대한변협 인권위원장이었던 박영립 단장은 일본에서 한 장의 편지를 들고 찾아온 일본 변호사 2명을 만났다. 도쿠다 야스유키와 오오츠카 후사노리 변호사였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소록도 갱생원에서 일제가 저지른 강제 단종과 낙태, 생체실험, 강제노역 등의 만행을 상세히 설명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내보자고 제안했다. 박 단장은 당시 “너무나 민망하고 부끄러웠다”고 한다. 한국인인 자신보다 일본 변호사들이 한국의 아픈 역사를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변호사들이 소송을 준비하는 자세는 참 존경스러웠다. 소록도에 직접 찾아가 한센인들의 진술을 직접 듣고 싶다고 하더라. 우리가 ‘사법연수원생들에게 부탁해 대신 진술을 받아오라고 하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도쿠다 변호사가 ‘소송은 판사를 설득하는 작업이다. 변호사가 의뢰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면 어떻게 판사를 설득할 수 있겠나’라며 변호사가 직접 진술을 들어야 한다고 하더라.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창피하던지. 도쿠다 변호사는 올해 80살인데,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소송에 참여했다. 지금도 한국에 올 때마다 소록도를 찾는다.”
한국과 일본 변호사들은 2004년 8월 일본 법원에 소송을 냈다. 대만의 낙생원 피해자들도 같은 시기에 소송을 냈는데, 소송 결과는 한국과 대만이 정반대였다. 2005년 10월25일 한국 소록도 피해자들은 패소했지만, 대만은 승소했다. 두 소송을 맡은 각각의 재판부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일본 시민사회에서 한국의 패소 판결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언론도 산케이신문 같은 우익 신문들까지 법원 판결을 비난했다. 결국 일본 의회는 2006년 2월 한국과 대만의 한센인 피해자까지 보상하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이 법에 따라 한국 한센인 590명이 1인당 1억원 정도의 보상금을 받게 됐다.
1945년 광복 이후 한국 정부가 실시했던 한센인 차별 정책도 일제 못지않았다. 1948년부터 소록도 갱생원에선 일제 패망과 함께 중단됐던 단종과 낙태수술이 재개됐고, 이후 부산 칠곡 익산 등 다른 정착촌으로 확산됐다. 단종·낙태 강제 수술은 1990년 전후까지 이어졌다. 정부는 2007년 ‘한센인 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2012년부터 보상을 시작했으나, 기초생활수급자에게만 월 15만원을 지급하는 데 그쳤다. 이에 한센인권변호단은 2011년 10월 원고 19명의 손해배상 소송을 시작으로 모두 539명의 집단 소송을 진행했고, 2017년 2월15일 대법원에서 한센인 단종·낙태 수술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일본 변호사들의 시민운동 방식은 어떤 특징이 있나?
“일본 시민사회가 사회적 이슈를 해결하는 방식은 본받을 만하다. 그들은 어떤 이슈에 대한 문제 제기를 1회성으로 끝내지 않는다. 끝까지 천착해 시간이 걸리더라도 깔끔하게 해결하려 한다. 특히 법정 투쟁을 통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먼저 소송을 내 승소하면 정치인들을 압박해 관련 법을 만들어 해결하는 방식이다. 소송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의회 입법을 끌어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일본은 이미 1920년대에 ‘자유법조단’이란 단체가 만들어질 정도로 변호사들의 시민운동 참여가 활발했다. 우리나라의 민변과 비슷한 단체다.”
―한센인권변호단이 다른 일본 과거사 문제 해결의 모델이 될 수 있을까.
“2015년 한센인 보상 문제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에 강제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같은 다른 과거사 문제도 함께 해결해 보자는 공감대가 있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도 있으니까 한센인 소송처럼 일본 법정에서 소송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2015년 박근혜 정권과 아베 정권이 ‘한·일 위안부 합의’를 들고나오는 바람에 변호인단 안에서 제대로 논의도 못 해보고 흐지부지됐다. 일본 변호사들 말로는 문재인 정권 들어 위안부 합의가 파기되면서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더욱 심해져 일본 시민사회에서 다른 과거사 문제를 이슈화하기 어려운 상태가 됐다고 한다. 안타깝다.”
―한센인 문제와 다른 과거사 문제는 큰 차이가 있지 않나?
“한센인 소송도 처음엔 해결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대만 변호사들이 함께 연대해 소송을 준비하면서 어려움을 해결해 나간 것이다. 한센인 소송에서 가장 중점을 둔 건 피해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이었다. 진술서 작업은 단지 소송 준비 차원이 아니라, 기자회견 등을 통해 여론의 호응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센인 소송이 그 오랜 시간 동안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성과를 낸 건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일본 사회를 볼 때 과거사 문제 해결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시민사회와 끊임없는 교류와 연대를 통해 계속 시도해야 한다. 일본의 양심세력이라 불리는 시민운동 활동가들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굉장히 우려하고 부끄럽게 여긴다. 도쿠다 변호사만 하더라도 아버지가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 전범이었는데, 우리 변호사들 앞에서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런 분들의 손을 잡으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