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신상목(국문 88학번) 미션탐사부장 기고, '그래도 가을엔 기도하게 하소서'
10월 중순으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낮 기온은 20도가 넘는다. 거리엔 겨울용 패딩을 입은 어르신 옆에 반팔 반바지 차림의 젊은이들이 활보한다. 이런 온화한 날씨에서는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구절을 읊기가 어색하다. 아직 낙엽이 없기에 기도하며 겸허한 모국어로 채울 수 없다. 여전히 풍성한 가로수 나뭇잎을 보노라면 ‘나의 영혼’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호올로 있게’ 해 달라는 간구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날씨가 어떻든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여야 한다. 무엇보다 홀로 탄식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과학문명과 기술의 진보, 디지털 혁명과 인공지능(AI)이 황금빛 미래를 가져올 거라는 믿음이 충만한 시대에 웬 청승이냐고 물을 수 있다. 가을이나 기도, 시 같은 주제는 시대에 뒤떨어져 보인다. 자고 나면 새 건물이 들어서고 돈만 있으면 인생 전체를 살 수 있는 시대. 행복을 나의 신으로 삼아 즐겁게 예배하는데 무슨 시시콜콜한 감상주의냐고 비판할 수 있다. 현대문명은 그렇게 무한 행복과 자유, 그리고 성공을 속삭인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정반대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매일 38명이 자살했다는 최근 통계는 비통함과 함께 신음을 토하게 만든다. 10대 자살률은 1983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우울, 염려 등 온갖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가. SNS에 수많은 팔로어와 친구가 있음에도 사람들은 왜 외로워할까. 적자도 아니고 9조원이 넘는 천문학적 영업이익을 달성했으면서도 왜 어떤 회사 대표는 국민을 향해 사과해야 하는 것일까. 코로나19 팬데믹과 경제 불황, 정치적 불안정, 재앙으로 다가온 기후변화, 위기의 한반도, 그리고 금방이라도 아마겟돈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중동의 불안과 혼란은 우리를 절망케 한다.
최근 ‘현대 사회 생존법’을 쓴 스위스 출신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오늘의 불안과 혼돈을 진단하면서 “집단적 광기 혹은 행성 차원의 절멸에 이렇게 근접한 적이 없었다. 현대성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의 풍경을 사정없이 황폐화시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대의 삶은 치료가 필요한 일종의 질병”이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사람은 물질문명 즐기기를 포기하고 한적한 산골, 바다, 남태평양의 섬들, 알프스의 프라이빗 스파와 캐나다 밴프, 이집트 시나이반도의 이국적 도시, 핀란드의 오로라 여행을 버킷리스트 삼아 떠난다. 숨조차 쉴 수 없는 현대 시스템에서 잠시 숨을 돌리려는 시도일지 모른다. 그러나 잠깐 자리를 피한다고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야말로 현대적 질병의 치료제가 될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절망을 창조주에게 맡기며 의탁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다. 맘모니즘, 과학과 기술 숭배, 에고이즘과 쾌락주의 너머에서 오늘도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절대자를 향한 믿음과 갈구, 읊조림이야말로 근원적 치유제가 아닐까.
이 가을엔 나 홀로, 방에서, 은밀하게 기도해보면 어떨까. 기도한다며 소리를 낼 필요는 없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도는 호흡과 같으며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하지 않는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침묵과 고요 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어도 좋겠다. 마치 4세기 이집트의 은둔자이자 사막의 수도사였던 안토니우스처럼,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달라고 기도했던 이탈리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처럼 말이다.
기도할 줄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예수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태복음 6: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