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운명을 돌파하고 시대의 과제를 돌파했던 정치 인생…백재현(AMP 1기) 전 국회 사무총장

운명을 돌파하고 시대의 과제를 돌파했던 정치 인생…백재현(AMP 1기) 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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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19·20대 3선 국회의원을 끝으로 정계 은퇴를 생각했으나 지난해 국회 사무총장으로 여의도에 복귀, 지난 6월 사무총장직에서 퇴임한 백재현 한국세무사회 고문. “국회 사무총장으로 국민께 마지막 봉사 학점을 따기로 하고 최선을 다해 일했으니, 이제 졸업작품으로 그동안의 기록(회고록)을 제출하기로 했다”며 회고록 ‘돌파’를 들고 세무사회관을 찾았다. 백재현 고문을 만나 ‘돌파’에 담긴 그의 33년 6개월 정치 인생과 세무사 회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당부의 이야기를 인터뷰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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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현 고문은 그의 회고록 제목처럼 ‘돌파의 정치인’이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철거민의 설움을 느끼고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에 도전, 야간대학에 진학하며 어려운 가정환경을 ‘돌파’해야 했다. 또 1991년, 지방의회에서 무보수 명예직 기초의원으로 시작해 광역의원, 기초자치단체장의 15년을 지내며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돌파’를 택해야 했다. 2008년 여의도에 첫발을 들인 후 3선 국회의원을 지내는 동안, 야당 의원으로서 치열하게 싸웠고 당 정책위원장, 국회 예결위원장으로서 더 치열하게 협상하며 피하지 않고 ‘돌파’해 나갔다.

이에 대해 백재현 고문은 ‘인생의 3가지 터닝포인트’를 겪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터닝포인트는 1970년에 19세의 나이로 세무공무원에 합격했던 일이고, 두 번째는 1981년 제18회 세무사 시험에 합격했던 일, 세 번째는 민선 2기로 제13대 광명시장에 당선됐던 일입니다”

◆ 첫 번째 터닝포인트…밀주 단속하던 세무공무원, 서민의 어려운 살림을 엿보다

세무공무원이 된 후 백재현 고문은 밀주 단속을 다니며 팍팍한 서민 살림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주세령을 선포하며 면허 없이 만든 술을 단속하던 것이 1970년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를 두고 백재현 고문은 “당시 가난한 농촌 실정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법 적용”이었다고 회상했다. “모두가 힘든 시절, 끼니 해결조차 어려운 사람들에게 세금을 받으러 다니면 그런 고역이 없었어요. 신고를 받고 단속을 가서 쌀독을 열어보면 술은 고사하고 쌀이 떨어져서 텅 빈 쌀독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금을 걷으러 가서 오히려 몰래 돈을 놓고 오는 경우도 다반사였습니다” (이때부터 백 고문은 어려운 이들의 팍팍한 살림살이를 보며 이들 삶의 돌파구가 되어 주고자 정치의 꿈을 품게 되었을지 모른다)

반대로 세금 추징이 즐거웠던 적도 있었다. 그는 “외국투자법인이나 덩치가 큰 기업들에 세금을 부과할 때는 치기 어린 애국심의 발로(?) 혹은 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최선을 다했었다”며 1980~90년대 3대 방직회사 중 하나였던 곳의 세무 실사를 나갔다가 여공 3천명의 임금체불 이야기를 듣고, 원사(천을 짜는 실)의 정확한 원가를 계산하기 위해 책을 사서 밤새 연구했던 일을 들려주기도 했다.

◆ 두 번째 터닝포인트…제18회 세무사 시험 합격 후 세무사로 일하며 세상을 배우다

세무사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은 백재현 고문은 신문배달을 하며 준비하던 검정고시, 대입 준비에 이어 1980년 세 번째 주경아독에 들어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잠을 줄여가며 세무사 시험을 준비하다가 급성 간염에 걸리기도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돌파의 힘’ 덕분이었다. 마침내 1981년 제18회 세무사 시험에 합격한 후 세무사 사무소를 개업하여 본격적으로 사무실 경영에 나섰다. 백재현 고문은 당시를 기억하며 “세무사로 일하면서 세상을 배웠다”고 말했다.

세무공무원과는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되어 지역경제의 흐름과 지역사회의 여론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서민의 삶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지고 한국세무사회의 사회공헌 슬로건 ‘세무사! 국민 속으로’와 일맥상통하게도 국민의 사업현장 속으로 깊이 파고들게 된 것이다.

◆ 세 번째 터닝포인트…시의원, 광역의원, 기초자치단체장을 거쳐 광명시장에 당선

지방의원이 유급제가 된 것은 2006년 일로 1991년 당시 시의원은 무보수 명예직이었다. 하지만 백재현 고문은 절대 허투루 일하지 않았다. 첫 의정활동으로 세무사로서 전문성을 살려 세입 부분 체계의 토대를 만들고 지방세 징수, 체납액 처리, 국세행정을 지방세 행정에 접목하는 일을 했다. 이때도 세무사로 일했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던 것이다. “공무원과 세무사로 일한 것이 세금 부과와 관련된 법의 체계, 배경 등을 이해하는데 밑바탕이 됐고 세무사 개업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지역사회의 네트워크를 갖게 된 것도 시의원 활동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후 1995년에는 경기도의원에 당선되고 1998년부터 두 차례 광명시장을 역임했다. 백 고문은 시장 재임 시절 가장 큰 성과로 2000년 ‘환경기초시설 빅딜’을 꼽았다. 광명시 접경지역인 구로구에 서울시가 쓰레기 소각장을 지으려 하자 광명시 하수 처리를 서울시설에서 처리해 주는 빅딜을 제안하여 소각장과 하수 처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일이다. 이러한 성과는 국내 최초의 지방자치단체 간 환경 빅딜 성공모델로 중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렸으며 행정학계에서 주요 연구사례로 다뤄지기도 했다.

이렇듯 광명시장으로 일했던 경험은 백재현 고문을 행정전문가, 나라 살림 전문가로 키워 주었고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던 12년 동안 국정감사 최우수 의원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주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 청년 세무사에게 “세무사들은 대한민국 경제계 리더가 될 자질이 충분”

후배들에게 전하는 조언에 대해 질문하자 백재현 고문은 “젊은 세무사들은 세무사로 일했었던 경험만으로도 대한민국 경제계 리더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며 “제 정치 인생 33년 6개월을 있게 했던 돌파의 원동력은 모두 세무사 자격증에서 나온 것”이라며 후배들의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권했다.

끝으로 한국세무사회와 세무사 회원들이 반드시 돌파해야 할 과제로 “세무사회를 중심으로 단결해 줄 것”을 주문했다. “오랫동안 한국세무사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했던 일들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세무사회를 중심으로 뭉치는 단결의 힘이 있다면 그 어떤 난관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회원 여러분 곁에서 단합된 세무사회를 응원하고 지원해주는 조력자로 남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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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현 한국세무사회 고문은...

1951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검정고시를 통과해 19살에 세무공무원이 되었다. 1982년 세무사 시험에 합격하여 백재현세무회계사무소를 전국에서 손꼽히는 규모로 키웠다.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첫 선거에 출마해 광명시의원으로 정치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1995년 경기도의원에 당선, 통상경제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98년부터 두 차례 광명시장 재임 중 환경기초시설 빅딜, 평생학습도시 선언, 시립노인요양센터 설립 등 전국 최초 기록을 세웠다.

2008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3선 의원을 지내며 당 정책위의장, 국회 예산결산위원장 등 중요한 요직을 경험했으며 한국지방세연구원 이사장을 거쳐 2023년 12월 국회 사무총장으로 여의도에 복귀했다가 지난 6월 퇴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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